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프 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초기 스페인의 대패와 리프 공화국의 성립 === [[중세]]부터 꾸준히 있었던 스페인과 모로코의 분쟁은 19세기 이후 스페인의 모로코 간섭과 지배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와 필리핀 등을 잃고 마지막 남은 아프리카 식민지라도 어떻게든 지키고자 했으며 열강의 다툼으로 [[모로코 위기]]가 발생해 전 모로코를 식민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프랑스와 함께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는 데는 성공했다. 이후 [[스페인령 사하라]]와 [[스페인령 모로코]] 식민지를 설치하고 [[모로코 왕국]]에 정치적인 간섭을 행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모로코인들과 베르베르족은 몇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비록 1차 리프 전쟁과 2차 리프 전쟁 당시의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2차 전쟁 당시 스페인군을 크게 고전시킨 리프 지역의 베르베르족은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이들에게 위협을 느낀 스페인군은 마누엘 실베스트레 장군을 총대장으로 하여 모로코계 스페인 협력군인 아스카리와 [[스페인 외인부대]]를 중심으로 2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편성해 베르베르족을 완전히 소탕하려고 하였다. 당시의 지휘관 중에는 훗날 스페인 총통이 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있었다. 이에 리프 지역 베르베르 부족은 3천명의 부족 병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아브드 엘크림]](Abd el-krim)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교사 출신으로 [[스페인어]]에 능통했고 유럽인들과의 오랜 접촉으로 서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누알 전투]](Battle of Annual)에서 실베스트레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 주력은 기세좋게 진격했지만 아브드 엘크림이 이끄는 리프 군대의 매복에 걸려 포위되어 완벽히 섬멸당한다. '아누알의 재앙'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실베스트레 장군은 패주 중에 실종됐고 나머지 지휘관인 펠리페 나바로와 가브리엘 모랄레스는 포로로 잡힌다.[* 이후 이 아누알 전투 패배와 엉망이었던 뒷처리는 [[보르본 왕조]] 폐지와 [[스페인 내전]]의 원인이 됐을 정도로 그 충격이 컸다. 총리와 대립하며 스페인 정계에서 강경파에 직접 힘을 실어 줬던 [[알폰소 13세]]는 이 전투의 여파로 정치적 인기를 급격히 잃었고 이어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리프 부족군의 대승에 모로코에서는 반 스페인 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수많은 주변 부족들과 모로코인들이 열정적으로 리프에 가담했다. 이윽고 리프군은 8만에 달하는 대병력으로 성장했고 리프군은 [[멜리야]]와 인근 스페인령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 까지 진격했지만 도시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퇴각한다. 물론 멜라야로 진격할 즈음 이미 엄청난 성과로 리프(Rif) 부족들간 동맹이 느슨해진 것도 있었고 보급선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엘크림은 그 뒤로도 [[멜리야]]를 함락시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스페인으로서는 그 사이에 호세 상후르호(Jose Sanjurjo)의 36,000명 원군이 도착하여 동부지역은 지켜낼 수 있었다. 어쨌든 3개월 간 이 압도적인 전과로 인해 리프 부족은 1920년 9월 18일 리프 공화국을 세우고 아브드 엘크림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프 공화국은 서구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지던 [[소련]]으로부터 국가로 승인을 받아 물자 원조를 약속받는 등 국가로서의 체제를 신속하게 갖추어 갔다. 반면 스페인은 대폭적인 증원을 파견해 공세로 전환했지만 [[셰프샤우엔]] 전투에서 또 다시 대패하고 모로코에서 전면 철수의 위기까지 몰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